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타구치 렌야 (문단 편집) == 어록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무타구치 렌야/infor.jpg|width=100%]]}}} || || 제15군사령관 무타구치 렌야 중장 || 그 유명한 '''[[임팔 작전]]''' 등으로 [[일본군]]을 패전으로 몰고 간 인물. 파벌과 인맥으로 [[카스트]] 제도 같은 계급을 결정하는 [[일본군]] 지휘관답게 수많은 실패에도 끝까지 책임은 안 지고 [[요직]]에 남았으며, 전후에도 잘 먹고 잘 살았다. 아무튼 장군이란 작자가 군사 교리와 병법의 기본조차 모르며, 본인만의 똥고집 신념으로 [[군대]]를 뒤흔드는 정신 나간 망언들을 상당히 많이 했다.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적의 것을 빼앗아 쓰는 [[노획]]을 통한 보급은 [[고대]] ~ [[중세]] 시대인 [[산업화]] 이전의 전쟁에서나 먹히는 전략이다. 심지어 그 시대에서조차 노획은 어디까지나 전리품 정도의 부수적인 개념이었지 군대의 보급을 대처하는 수단이 되지는 못했다.[* 다만 마냥 비판하기도 어려운데, 현대전에서 여러 사례가 있으며, 그 중 대표격인 게 [[탈레반]]이 아프간군과 미군에게서 보급품을 탈탈 털어내어 정규 육군과 공군을 창설한 사건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의 어느 장수든 보급 완비는 군대의 기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단 한 번의 전투만으로 적군의 모든 병력들이 [[모랄빵]] 나서 도망친다면 전리품을 많이 얻을 수 있겠지만, 패배한다고 한들 적군도 그렇게 가만히 둘 이유가 없다. [[청야전술]]이 왜 발달했는지를 생각해보자. 만약 전황이 불리해 보인다면 바로 청야전술을 펼치기만 해도 적군이 물자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은 전투 중에 죽은 적군 병사의 시체에서 보급하는 방법 뿐이다. 현지에서 징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무조건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을 수는 없다. 징발이나 약탈이 가능한 물자는 [[인구]]에 따라 한계가 있고,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힐 경우 부작용으로 현지 물정을 잘 아는 [[게릴라]] 등이 양산되거나 적에게 협력하는 수가 있어 최대한 피해야 하는 수단이다.[* 현대에는 [[인공위성]]의 발명으로 전장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인공위성도 없었던 옛날의 가장 효율적인 현지 정보 습득 수단은 현지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에게 상황을 보고 받는 것이었다. 즉, 손수 발로 뛰는 것. 인공위성이 떠다니는 현대에도 아직 유효한 수단이다.] [[프랑스]]의 정복 군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은 '''"[[병참|군대는 잘 먹어야 진격한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군대의 보급에 진심이었던 인물이다. [[프랑스 혁명]]부터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병력의 보급 문제를 해결하고 빠른 행군을 위해 개발된 것이 바로 [[병조림]]이며, 이것을 영국군이 개조하여 만든 것이 바로 지금의 [[통조림]]이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보급 문제를 상당히 신경 썼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청야전술로 인해 기껏 [[모스크바]]까지 쳐들어 왔음에도 러시아의 혹한과 보급품 고갈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했다는 점에서 보급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병조림을 만들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썼음에도 당대 [[프랑스군]]은 가장 약탈이 심각한 군대로 악명이 높았다. 프랑스군이 한 번 휩쓸고 간 자리는 멀쩡하게 서 있는 집이 단 한 채도 없었다고 한다. 집을 뜯어다 자신들의 숙영지를 짓는 데에 썼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프랑스]]는 점령지에서 민심을 빠르게 잃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군이 국민개병제를 바탕으로 대육군(Grande Armée)이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이전 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의 전력을 주변 국가보다 한 시대 먼저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국토와 인구에서 징병을 통해 확보한 거대한 규모의 육군 전력이 당대 [[서유럽]] 최강국이던 프랑스의 국력(특히 군사력) 기반이었지만, 그 거대한 규모만큼 보급 부담도 거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병조림([[통조림]])과 같은 신기술 개발까지 추진하면서도 그걸로 다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은 잔인하긴 하지만 현지 약탈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류가 벌인 전쟁 중에는 압도적인 상황에서 보급로를 지키지 못해 전세가 뒤집힌 전쟁이 매우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바로 '''[[살수대첩]]'''이다. 물론 [[한니발 바르카]]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보급로의 유무와 무관하게 강력한 회전으로 결착을 내던 사령관들도 있었으나, 저들도 현지 조달이건 약탈이건 간에 일단 보급은 최대한 끊기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사실 한니발이나 카이사르는 주로 적지에서 자기 편을 만들어둬서 보급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이들이 배신하지 않는 한 보급 부족에 시달릴 일은 없었다. 다만 한니발 같은 경우에도 결국은 [[로마군]]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전략에 따라 [[히스파니아]]를 시작으로 보급선을 전부 차단하자 결국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도 갈리아에서 배신을 당하는 바람에 보급이 부족해진 적은 있지만, 다행히 적들이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바람에 이를 격파하고 갈리아 전쟁을 승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한니발은 본국 [[카르타고]]로부터 지속적인 보급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현지 조달을 전제로 [[이탈리아]] 원정을 실행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무기나 부품, 탄약 등 '민수용품으로 대체할 수 없는 보급 수요'의 비중이 근현대보다 훨씬 낮던 <산업화 이전, 고대의 전쟁 환경>이었고, 한니발의 원정 무대인 [[이탈리아]]는 '당시로써는 높은 인구 밀도와 개발 진척도'로 한니발이 거느린 병력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잉여 물자의 확보가 용이한 지역이었으며, 이런 물자를 조달하는 방법 역시 단순히 '뺏으면 된다'가 아니라 당시의 이탈리아 정세와 로마 연합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이용하여 [[로마]]에 반감을 가진 이들[*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국가]] 시민들이나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 부족 등.]에게 그 대안으로써의 자신을 어필하여 로마 지지 세력으로부터 이탈시켜 자신을 지지하게 한다는 전략적 구상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철저한 전략적 구상 하에 [[2차 포에니 전쟁]] 초기 로마군을 연이어 비참할 정도로 처발라대던 실적까지 보여주고서도 결국 보급 역량의 부족으로 로마에 치명타를 입히지 못하고 전략적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카이사르 역시 갈리아 전쟁기 때 베르킨게토릭스의 청야전술에 당해 패퇴 직전까지 몰리던 게 베르킨게토릭스의 오판으로 일어난 회전에서 로마군이 대역전을 벌이고, 이후 일어난 [[알레시아 전투]]마저 승리함으로써 승기를 굳힌 어찌 보면 '''매우 운이 좋았던''' 케이스이다. 갈리아 전쟁 당시 카이사르는 꾸준히 주변 동맹국, 동맹 갈리아 부족으로부터 요청을 가장한 협박으로 보급품을 취했다. 당연히 본국인 로마에서도 보급품을 받았다. 그리고 저 카이사르도 보급로 무시하고 생각 없이 포위전 치렀다가 제대로 홍역을 치른 전투가 바로 내전기의 [[디라키움 공방전]]. 물론 이쪽은 숫적 열세 등 다소 복합적인 상황이 있는 전투지만 폼페이우스의 보급로 차단 등으로 카이사르군이 고전을 치렀기도 했기 때문에 아예 무관하진 않다.[* 실제로 폼페이우스가 잘 수비하다가 공세를 취한 이유도 곧 수확철이 다가와 카이사르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상황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국 디라키움에선 실패했으나 또 '''운 좋게'''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승리하여 최종 승리자가 된 것이다. 즉, 카이사르는 어디까지나 상대 측의 실수와 이를 캐치한 카이사르의 능력으로 카이사르의 장기인 회전에 상대가 응해줘서 이를 이용해 상대를 박살내서 상대적으로 보급과 무관한 명장이라는 인식이 커진 것일 뿐, 그 명장인 카이사르조차 보급을 등한시하다 크게 말릴 뻔한 전적이 있었다는 소리다. 게다가 카이사르가 이런 식의 허리띠 졸라매기가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이끄는 병사들이 장장 10년 이상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그야말로 '''동서고금 [[지중해]] 세계 최강의 정예병'''으로 평가 받는 카이사르 군단의 역전의 용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갈리아에서 청야전술에 그 고생을 하면서도 부대가 와해되거나 탈영병이 생기지도 않을 만큼 엄청난 사기와 감투 정신, 그리고 자급자족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디라키움에서 한두 달 배 곯는 건 이들에겐 일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이를 조롱하는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에게 자기들이 식량으로 쓰던 구근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져 응수할 정도였다. 급여 문제로 폭동 직전까지 갔다가도 연단에 오른 카이사르가 "제대를 허락한다. '''시민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안전한 후방에 대기하다가 전역하면 된다. 급여와 퇴직금은 정상적으로 지불하겠다. 그간 고생 많았다."는 짤막한 연설을 하자 곧바로 바짓가랑이 붙잡고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다시 싸우게 해주십시오!" 하고 매달릴 만큼 지휘관 카이사르에 대한 충성심도 엄청났다. 이는 다시 말해 이 정도의 사기, 감투 정신, 전투 경험, 조직력, 충성심이 있는 군대여야만 보급이 없이도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카이사르도 자신의 병사들이 아직 미숙하던 갈리아 전쟁 초기에는 보급을 경시한 초강경 공세 작전을 펼친 적이 없으며, 항상 장병들이 잘 먹고 잘 쉴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게다가 20세기에 접어들어서도 그리고 지금 현재에도 적지(敵地) 탈환을 통한 현지 조달에 회의적인 상황이다. 산업화, 특히 부품 규격을 일정하게 관리한 뒤의 전장에서는 같은 가솔린 연료라도 [[옥탄가]]가 다를 수 있고[* 군용 차량은 일반 차량 대비 디젤 플런저 분사나, 가솔린 [[카뷰레터]] 방식을 비교적 오래도록 써먹었지만, 커먼레일 디젤이나 EFI 가솔린은 연료 품질에 매우 민감하여 까딱 잘못하면 작전 중 엔진 시동이 꺼지는 등 치명적인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적군에게서 무장을 노획해도 정작 탄약을 적군에게서 뺏어오지 않는 한 결국 탄약이 고갈되어 기껏 노획한 무장이 무용지물이 되므로[* 자동소총을 기준으로 보통 끽해야 병사 한 명 당 4~5개 탄창 분량을 휴대하는 게 고작이다. 탄약고 등 탄약을 보급하는 시설을 손에 넣는다면 해결될 거 같지만, 그만한 시설을 점령하려 해도 많은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그리고 이걸 모두 만족해봤자 '''탄종 호환이 안 되면 말짱 도루묵이다'''. 당장 서방세계의 주력 탄종은 5.56mm이나 구 [[소련]]계 주력 탄종이 7.62mm로 전혀 호환이 안 된다. 게임이야 어디까지나 [[게임적 허용]]으로 넘어가지만 현실에선 얄짤없다.], 보급품을 전장에서 조달한다는 개념은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는다'''. [[아돌프 히틀러]]는 [[아르덴 대공세]]를 계획할 때 [[독일 국방군]] 연료 수급 상황으로는 작전 실행을 거의 못하지만 '''"간단히 풀 수 있다. 연합군 거 탈취하면 그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기에 퇴각할 때 독일군이 노획,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청야전술|후송하거나 파괴]]했다. 이는 정말 당연한 상식이었다. 보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작전을 시도했던 경우는 물론 역사에서 많았으나[* 대표적인 게 상술한 한니발의 로마 진공, 카이사르의 갈리아 진공, 그리고 [[청나라]]의 [[조선]] 침공인 [[병자호란]] 등이 있다.], 대체로 이러한 기동전의 목적은 '''보급을 희생하는 도박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작전이 성공할 시 얻는 메리트가 크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표적으로 한니발의 로마 침공 역시 성공 시엔 오랜 숙적인 로마를 점령하고 지중해 패권을 카르타고가 로마에게서 뺏어올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메리트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투도 갈리아 전투 성공으로 인한 개선식 및 이를 이용한 정치권력 확대 등의 메리트가 있고, 병자호란 역시 청측이 승리할 경우 적국인 [[명나라]]의 동맹이자 배후에서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조선]]을 복속시킬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었다. 하지만 [[임팔 작전]]의 경우 성공한다고 한들 얻는 거라곤 이미 어느 정도 확정된 [[동남아시아]]의 안전이 조금 더 증가하는 수준과 추후 [[인도]] 진공에 유리한 교두보 확보가 전부인 반면 실패 시엔 기껏 점령한 동남아 자원지대가 모조리 적에게 넘어가는, 리턴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나도 큰 작전이었다. '''무엇보다 적군도 아군과 판단이 같다면, 이기든 지든 간에 그날 그 전투는 끝장이다'''. >'''무기의 부족이 패배의 원인은 될 수 없다'''. >貴様等のこのざまは何だ。それでも帝国陸軍か! こういうのを魂の抜け殻と言うのだ」と怒鳴り散らしていた。それでも兵達は動こうと。 >---- >네 놈들의 꼴은 뭐냐? 그러고도 제국육군인가! 이런 걸 영혼이 빠져나간 껍데기라고 하는 거다. >---- >1944년 8월, 참모들을 데리고 전선 시찰 중이던 무타구치가 임팔 작전에서 돌아온 '''부상병'''들을 향해. 제31사단 제58연대 생존자였던 우치야마 이치로(内山一郎) 상병의 증언 중. >무타구치 : 貴様は病気を口実に後に下がった。自分の部下をどうしたのか。病気は何だ。 > >소좌 : 負傷とマラリアと下痢であります。 > >무타구치 : そんなものは病気じゃない。貴様のような大隊長が居るから負けるんだ。この大馬鹿者。 >---- >무타구치 : 네놈은 병을 핑계로 후퇴했다. 부하들은 어떻게 했느냐. 병명이 뭐냐? > >소좌 : 부상과 [[말라리아]]와 [[이질(질병)|이질]]입니다. > >무타구치 : (지팡이로 소좌를 계속 때리면서) '''그런 걸 병이라고 할 수 없다. 네 놈 같은 대대장이 있기에 싸움에 지는 거다. 이 멍청한 놈아!'''[* 둘 다 탈수와 고열 등으로 활동 능력이 극으로 떨어지는 무서운 병이다.] >---- >제31사단 제58연대 생존자였던 우치야마 이치로(内山一郎) 상병의 증언 중. >諸君、佐藤烈兵団長は、軍命に背きコヒマ方面の戦線を放棄した。食う物がないから戦争は出来んと言って勝手に退りよった。これが皇軍か。皇軍は食う物がなくても戦い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兵器がない、やれ弾丸がない、食う物がないなどは戦いを放棄する理由にならぬ。弾丸がなかったら銃剣があるじゃないか。銃剣がなくなれば、腕でいくんじゃ。腕もなくなったら足で蹴れ。足もやられたら口で噛みついて行け。日本男子には大和魂があるということを忘れちゃいかん。日本は神州である。神々が守って下さる… >---- >제군, [[사토 고토쿠|사토]] 군단장은 군명을 어기고 코히마 방면의 전선을 포기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전쟁을 할 수 없다며 제멋대로 퇴각했다. 이것이 황군인가. 황군은 먹을 것이 없더라도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무기가 없다, 탄환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는 것 따위는 싸움을 포기할 이유가 안 된다. '''탄환이 없다면 총검이 있잖은가. 총검이 없다면 맨손으로 싸우는 거다. 맨손도 쓸 수 없다면 발로 걷어차라. 발도 쓸 수 없다면 입으로 물어뜯어라. 일본 남자에게 [[카미카제|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일본은 [[국가신토|신의 나라]]다. [[개소리|신들께서 지켜주신다]].''' >---- >1944년 7월 10일, 자신이 만든 제단 앞에서 장교들을 집결한 후 임팔 작전의 훈시 중. 후루카와 사토시 저, 『은밀한 세계(葉隠の世界)』- 304 ~ 305p. 그야말로 '''[[똥군기]] 찬양의 극치'''. 직접 전투를 행하는 입장에서야 각오를 다지기 위해 저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보급을 책임져야 할 관리자의 입장에서 저 따위로 말하는 것은 단지 무책임한 직무유기일 뿐이다. [[전쟁 영화]] 등을 보면 후퇴 금지 명령 아래 장비 부족에도 무조건 특정 지점을 사수하지만, 현실은 가상과 달리 그렇지 않다. 대다수 군대의 사령부 지침은 전략/전술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 물자가 떨어지면 인력 낭비를 막기 위해 후퇴해서 보급을 주고 재투입한다. 즉, 후퇴 금지란 어디까지나 무절제한 적전 도주를 금지하는 거지 전략 - 전술상 후퇴가 필요하거나 사수가 필요하지 않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전쟁 영화 등에서 나오는 경우는 상당수가 특정 지점에 고립되어 보급과 후퇴가 불가능한 상황 또는 그 지역 자체가 적에게 넘어가면 전략적으로 큰 문제가 생기는 '''극단적인 곳들만 보여줘서''' 그런 오해와 혼동을 초래한다. 아무래도 극적인 연출이 필요하기도 하고 말이다. 게다가 식량과 무기의 보급이 완전히 끊겨 전투력이 발휘되지 않고 증원조차 불가능한 [[전멸]] 상황이라면, 일단 후퇴해 보급을 받으며 재편성을 해서 전투 효율을 높이고 공격을 다시 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다. 작전상 후퇴도 훌륭한 전술의 하나라는 것을 기억해두자. 근데 이 양반은 후퇴는 무조건 금지이니... 그걸 뿌리부터 뒤흔드는 무타구치의 참 주옥 같은 발언이다. 영화 같은 가상이면 인력에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인력이 가장 중요한데, 애초에 무기는 어떤 사람이 쓰느냐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그 분야를 전공한데다 전장에서 살아남아서 경험을 축적하고 숙련도를 키운 베테랑이 무기를 쓰는 것과, 그 분야를 전공한 적도 전혀 없고 전장에 나간 경험도 없거나 숙련도가 없거나 실력이 형편없는 아마추어가 쓰는 것은 당연히 큰 차이가 난다. 그 옛날 [[율리우스 카이사르]]조차 소수 정예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인력을 허비하면 인력이 모자라 아무리 탄탄하고 강력한 무기라도 한순간에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당장 현재 [[러시아 육군]]이 1만 대가 넘는 대량의 [[전차]]가 있는데도 실전에서 적게 활용하는 이유는 딴 거 없고 인력이 모자라서다. 그러니 전장에서는 할 수 있으면 [[보병]]들을 최대한 살리는 게 도리다. 그리고 저기서 마지막 문구의 '''일본은 [[국가신토|신의 나라]]다. 신들께서 지켜주신다'''라는 부분. 이 부분 역시 문제가 있는데, 일본이 전파 탐신에 대해 그토록 소극적이던 이유 역시 이 논리가 내포되어 있다. 당장 전파 탐신을 게을리 했다가 무슨 사태가 터질지는 대본영에서 직접 임팔을 먹으려고 작전을 처음 계획한, 그리고 무타구치가 반대했던 [[미드웨이 해전|1942년에 이미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인력이 남아있으면 상황에 따라 잃었던 지역을 다시 탈환할 수 있는 여력이 있지만, 몽땅 죽어 쓸려나갔다면 인원이 모자라 공백이 생겨 지켜야 할 곳들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적에게 밀려나가게 된다.[* [[마오쩌둥]]도 "땅을 버리고 사람을 구하면 다시 탈환할 수 있지만, 사람을 버리고 땅을 구하면 둘 다 잃는다."고 했다.] 물론 임팔 전투에서 대패한 여파로 인해 당연히 이러한 공백들이 생겨 일본군은 완전히 밀려났다. >'''식량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동물)|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토사구팽|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일명 '[[칭기즈 칸]] 작전'. 그런데 저 '식량'으로 쓰겠다는 [[코끼리]]와 [[소]]나 [[말(동물)|말]]은 대개 점령지에서 조달했는데, 먹이도 제대로 안 주고 부려먹기만 한 데다가 원래 장거리 이동을 잘 안 하는 종들이라 __먹은 소보다 지쳐서 객사한 소가 더 많았다.__[* [[인간]]은 다른 포유류들에 비해 단순 근력은 비교 자체가 미안할 정도로 후달리지만, 달리고 걸을 때의 [[지구력]] 하나만큼은 최상급이다. 수만 ~ 수십만 년 전의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사냥 기술이 바로 '''사냥감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쫓아가기'''였다. 소나 말은 인간에 비해 장거리 이동에는 상대적으로 체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일부는 강을 건너다가 떠내려 가거나, 산맥을 넘다 낭떠러지에서 추락하거나, 포격에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 거기에 그 동물들이 죽는 바람에 물자와 식량이 함께 날아가 실제로 무사히 온 개인 탄약의 양은 계획의 절반으로 쪼그라들 뿐이었다. 게다가 지쳐서 쓰러진 가축의 짐은 어거지로 하급 병사들에게 다 떠넘겨 짊어지게 하고 험난한 정글을 [[행군]]하도록 강요해서 부상이나 탈진 등의 비전투 손실을 야기했다. 더욱 후덜덜한 것은 병사들이 최소 40kg가 넘는 무게를 견디다 못해 몰래 조금씩 짐들을 정글에 버리는 통에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과 무기들이 더욱 빠르게 줄어드는 결과까지 야기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 가축들이 무사히 살아남더라도 전시 상황에서 살아있는 동물을 도축하고 조리해서 식량으로 쓰는 과정도 절대 쉽지 않다. 군대에서 괜히 보존식과 간편식 개발에 매달리는 게 아니다. 더욱이 수송 수단으로 쓸 가축들의 사료를 마련하는 방안에 대해 질문을 받자 "초식동물들이니까 걍 풀 뜯어먹으면 그만이잖아?"라고까지 했다. 군용 [[말(동물)|말]]이나 [[소]]들은 절대로 무타구치의 말대로 길가에 난 아무 풀이나 뜯어먹게 두어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건초 사료를 먹이는 게 정상이다.[* 인간이 사육하는 가축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인류에게 길들여지면서 이제는 인류의 손을 타지 않으면 야생에서 스스로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변질되어 야생에 풀어놓고 아무거나 막 먹게 하면 탈 난다. 애초에 야생동물들도 절대 아무 풀이나 다 먹지 않는다. 식물들이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먹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구성 성분을 복잡하게 분화시킨다. 한 종이 섭취할 수 있는 식물의 수는 절대 많지 않고, 그것도 원래부터 서식하고 있는 지역 한정이다. 심지어 [[정글]]이라면 독성이 강한 식물도 훨씬 많을 텐데, 독초라도 잘못 먹으면 소화불량과 양분 부족으로 죽는 건 시간문제다.] 만에 하나 재수 좋게 길가에 마침 말에게 먹이기 좋은 풀이 있다고 쳐도, 눈에 보이는 풀이란 풀의 씨를 싹 말려도 수송용 가축이 쓰는 막대한 칼로리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소]]를 직접 키워 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소에게 풀을 뜯기려면 적당한 초지에 데려가서 마음껏 먹도록 몇 시간씩 두거나, 새벽부터 푹 끓인 쇠죽을 먹여서 건초를 쉽게 소화하고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저 사람 밥 먹듯이 하루 3번 20~30분 동안 생풀만 줄창 뜯어먹게 하면 '''그냥 굶어 죽는다'''. 물론 소화기관 등의 차이로 아주 같지는 않겠지만,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생쌀이나 [[벼]]를 익히지도 않은 상태로 그냥 먹도록 하는 것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정말 생풀을 먹여서 배를 채워주려면 뜯어먹는 시간+되새김질하는 시간이 거진 소가 깨어 있는 시간 전체하고 맞먹을 정도로 상당히 길다. 하지만 1분 1초가 급해 죽겠는 전장에서 쉴 새 없이 짐을 날라야 할 소나 말들에게 하루종일 풀만 계속 뜯어먹게 놔둘 시간은 부족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풀을 말린 후 먹기 좋게 잘게 썰어 운반과 보관이 쉽게 장방형으로 뭉쳐 놓거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보리나 콩 등의 곡물을 사용했다. 전쟁 소설에 자주 언급되는 마초(馬草)[* 말에게 먹일 풀 사료. 보통 식량과 묶어서 '양초(糧草)'라고 한다.]가 군량과 함께 중요한 보급품으로 종종 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현대전으로 비교하면 차량 운용에 필요한 기름이나 마찬가지다. 기병의 군마는 물론이고 기병이 없어도 군량을 운송하려면 말이 끄는 수레를 써야 하므로 성 안에 틀어박혀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일이 없는 수성전이 아닌 이상 당연히 마초는 필수품이다. 결국 무타구치는 '''전근대 시절의 장군들보다 무식했던 셈'''이다. 물론 전근대에 가축의 전술적 중요성은 현대보다 훨씬 컸기에 가축에 대한 상식은 전근대의 장수들이 현대의 지휘관들보다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무타구치 입장에서도 꽤나 억울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반 지식도 없는 주제에 사전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런 엉터리 작전을 세웠으니 문제였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인 [[나치 독일]]을 비롯한 다른 [[추축국]]은 야전에서 연료를 아끼려고[* 사실 연료 문제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생산력이었다. 그 공업화로 잘 나가던 [[소련]]이나 기술력으로 자랑하던 [[나치 독일]], 정예병사를 자처하는 [[영국군]]마저 차량화를 완전히 못 했고, 종전까지 완벽하게 행군을 [[자동차]] 등의 차륜으로 대체한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하물며 자원도 없는 [[섬나라]] [[일본]]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상황에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아니 심지어 그 일본은 [[미국|자기네 물주]]를 상대로 [[태평양 전쟁|전쟁을 벌여]] 그나마 남아 있던 자기들의 자원줄을 스스로 끊어놓기까지 했다.] [[말(동물)|말]]로 많은 물자를 보급한 반면 기계화를 잘 했고 무엇보다도 자원이 넘쳐나고 [[Jeep|지프차]]가 썩어났던 미국은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030000&exception_mode=recommend&page=1|험지에선 말도 썼지만]], 거의 차량으로 보급품을 날라댔다. 추축국은 당연히 미국의 효율성을 못 따라갔다. 통에 든 가솔린만 먹고 움직이는 빠르고 센 자동차와 달리, 가축은 환경 변화에 취약하고 유지 및 보수가 힘든데다 운반량도 적다. 더구나 길가의 아무 풀이나 막 먹일 수는 없기 때문에 같은 거리를 가는데 훨씬 많은 부피와 무게의 사료가 필요했고, 이는 후방에서 무기나 필수품에다 많은 양의 사료까지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더구나 보내야 할 사료의 양이 늘어나면 사료 자체를 실어나르기 위한 가축이 추가되고, 다시 추가된 가축을 위한 사료가 또 추가되는 식으로 수송대의 규모를 여러 번 다시 계산해야 하는데, 이러다 보면 처음보다 당연히 데려가야 할 가축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진다. 경우가 다르지만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아무리 작은 전투라고 하더라도 병력이 수천 명 이상이 나온 이유이고, [[신라]]의 [[선덕여왕]]을 급습하기 위해 [[백제]]에서 꾸려서 보낸 '''작은 규모의 기습군'''이 500명이나 되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사료 문제도 전혀 감안하지 않고 가축으로만 수송대를 편성했으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2차 [[고수전쟁]]에서 [[수양제]]는 치중대 60만 명을 운영했지만 한 사람이 나를 수 있는 식량은 1.5석에 불과했는데, 이것조차 길고 험한 보급로 때문에 보급대 자신의 식량으로도 부족했다. 그 때문에 병사들은 자신이 먹을 식량을 들고 행군해야 했는데, 이 무게가 30~50kg이었다. 식량을 들고 가지 못하고 땅에 묻어 버린 병사가 속출했고, 식량이 떨어진 후에는 전투를 할 수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은 쾌속 진격을 했지만, 전선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보급 트럭이 전선 근처에 갈 때쯤에는 이미 실은 유류들이 모두 소진돼버린 뒤였다. 분명히 노르망디에는 미 본토에서 실어온 석유가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최전선에는 석유가 없어 진격이 둔화되어 버렸다. 이 아이러니를 해결하기 위해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는 [[안트베르펀]] 항구를 사용해 보급선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전략을 세우는데, 이것이 두고두고 삽질로 까이는 [[마켓 가든 작전]]이다.][* [[몽골 제국]]이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평소에 유목 생활을 통해 말의 생태에 익숙했을 뿐더러 유목민 생활 방식으로 인해 [[보르츠]]라는 지금도 쓰이는 방식으로 장기 보존과 무게 및 부피 축소가 가능한 휴대식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르츠는 가죽 자루 하나를 꽉 채우면 병사 10명이 보름치 먹을 식량이 될 정도로 뛰어난 휴대성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일본은 전투식량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대부분 생쌀만 짊어지고 갔다는 것이다. 그나마 [[건빵]]이나 군량 같은 휴대식량도 챙겼으나, 이것들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무거운 미곡을 통으로 짊어지고 가게 되었으니 기동력을 살린 전법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다만 처음부터 소와 말로 보급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상부#s-1|상부]]에 요청한 보급 지원 증강이 거절 당하자 이런 무리수를 둔 것인데...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했다면 애초에 이런 엽기적인 작전도 짜지 않았을 것이다.[* 더 기가 차는 사실은 보급 지원 증강을 거절 당한 이유가 이 작전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즉, 현실성이 없다고 지원을 거절 당하니까 더 현실성도 없고 막 나가는 대책을 내놓은 거다.] 그리고 그 [[칭기즈 칸]]의 작전도 상황과 맞지 않은 게, 칭키즈 칸 같은 경우 오랫동안 유목 생활로 기마를 매우 능숙하게 다루면서 기동력으로 넓은 들판에서 빠른 속도로 적을 제압하고 나라를 정복하는 전술을 구상했고, 말의 피와 젖을 먹으면서 살아오는 등 말은 이동 수단이자 가축이기 때문에 보급 같은 경우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문제는 [[임팔 작전]] 무대가 정글인데 당연히 이런 상황이라면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보급은 확실히 할 필요가 있는데 저런 방법으로 버틸 리가 없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제1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군]]에서도 '전쟁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같은 발언이 나온 적이 있었다. 1911년에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는 "비행기는 단지 장난감에 불과하며 군사적 가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이는 비행기가 아직 군사적으로 쓰이지도 않았으며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미숙했던 시절에 나왔던 이야기이다. [[라이트 형제]]가 첫 비행을 한 해가 1903년이고, [[프랑스]]에 처음으로 동력비행기 공장이 세워진 해가 1908년으로 고작 3년 전의 이야기었다. 이 당시는 '공군'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몇몇 열강들이 항공대를 창설하기 시작한 상태였으니 회의적인 입장이어도 이상하지 않다.[* 사실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게 저 때의 [[비행기]]의 성능은 상당히 처참해서 대전 초기엔 그냥 정찰용으로만 활용했고, 속력이 심하게 느려서 대공 사격이라도 당하면 [[끔살]] 확정이였다. 그 이후에 기관총을 달아 공중전에 이용하기도 했으나, 고장이 너무 잦아 전투하다 말고 지급 받은 망치로 기관총을 수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 당시 공군에게는 기관총 수리용 망치 하나와 자결용 권총 한 정을 쥐여줬을 정도로 항공기의 전략적 가치가 미미했던 때였다.] 게다가 그렇게 말한 말한 포슈 본인도 [[제1차 세계대전|1차 세계대전]] 때 항공기의 위력을 경험하고 항공 정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생각을 완전히 고쳤다. 그 당시 비행기는 그야말로 신생아 수준에 속도도 심하게 느려터져서 '''병사들이 총으로 쏴서 격추시키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생각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고, 이는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항공산업이 발전하고 항공기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진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일례로 [[영국군]]은 그 '써먹을 데 없는 항공기'로 [[일본군]]이 포위한 진지에 계속 항공 보급으로 각종 물자들을 쏟아부어 포위 상황에서도 계속 버텼다. 가끔 운 좋게 일부가 [[일본군]] 쪽으로 떨어지면 [[일본군]]들은 이것들을 '[[윈스턴 처칠|처칠]] 급여'라고 부르며 생명줄로 여겼다. 연합국 전투기들도 마냥 놀고만 있던 게 아니라서 최전선 병사들의 요청에 따라 [[근접항공지원]]을 위해 일본군 진지와 벙커, 참호를 공격하여 제압하고 막대한 인명피해를 야기했다. 추가로 항공 보급이나 근접화력지원 말고도 [[네이팜]]이나 [[소이탄]] 같은 걸 끼얹어서 정글을 통째로 태우는 활용법도 있었지만, 네이팜이 실전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한 건 1944년 [[일본군]]을 상대로 티니안 전투서 7월 말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일단 임팔에서는 논외로 친다. 이래놓곤 일선 부대에서 보급품이 모자란다고 [[하소연#s-1|하소연]]하자 일본 인종을 바꿔버리는 말을 했다. >ビルマにあって、周囲の山々はこれだけ青々としている。'''日本人はもともと草食動物なのである。'''これだけ青い山を周囲に抱えながら、食料に困るなどというのは、ありえないことだ。 >버마에서는 주변 산들이 이처럼 푸르다. '''[[일본인]]은 원래부터 [[초식동물]]이다'''. 이렇게나 푸른 산에 둘러싸여 있으니, 식량이 부족하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 >1944년 2월, [[임팔 작전]]을 입안하면서 보급 문제를 거론하는 참모들에게. 태평양 전쟁 - 일본의 패인 4(太平洋戦争 日本の敗因4) 147p >---- >이 초식동물 발언은 무타구치의 여러 해괴한 어록들 중에서도 그 임팩트가 상당히 강렬한 탓인지 무타구치 렌야와 [[임팔 작전]]을 설명할 때에 거의 반드시 인용되곤 한다(...). [[일본]]이 '''[[육식금지령|1000년 넘게 육식을 금지한 황당한 역사]]'''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나온 말일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이 [[사병 출신 장성]]이었다면 저런 역사 때문에 긴가민가해줄 텐데 정말 어이없게도 이 인간은 고등교육을 받고 정상적인 진급 코스를 밟아 온 '''정식 육사 출신'''이다. 혈통이나 신분만으로 갑자기 고위직을 덥석 차지한 [[낙하산 인사]]도 절대로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외부 보급에서 답이 없으니 옛날의 악법에 묶여살던 일본인의 특성을 날조하여 [[정신승리]]를 하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인 것이다. 그들이 진군한 [[정글]]은 '''녹색 [[사막]]'''이라 불릴 만큼 인구 부양력이 극도로 떨어지는 열악한 곳이다. 비가 너무 자주 와서 토양의 영양분은 다 씻겨나가버리는 데다 습기 때문에 각종 부패균과 [[곰팡이]]가 우글거리기 때문에, 기본적이고 억세고 단단하며 항균성(=독성)이 있는 식물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 무엇보다 애초에 생태계 전체로 봤을 때 인간이 섭취 가능한 식용 식물[* 현재 인류가 섭취 가능한 식품들의 절대 다수는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품종 개량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서 인류가 안전하게 먹을 수 있도록 개량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쌀]]은 원래는 독성이 있는 붉은색 작물이었고, [[옥수수]]는 다 자라봐야 성인 새끼손가락 수준밖에 안 자라는 몹쓸 작물이었지만, 오랜 개량 끝에 지금의 독성 성분 없는 흰쌀과 성인 팔뚝만한 옥수수가 탄생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많은 야생종은 아예 먹을 부분 자체가 없다. 조밥을 즐겨 먹는 사람이라도 [[강아지풀]]을 먹을 생각은 아예 못할 것이다. 일례로 길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많이 먹는 [[수산물]]은 길들여지지 않아서 아직도 독극물(예: [[복어]]독, 제철이 아닌 [[굴(어패류)|굴]] 등), 기생충(예: 민물고기, 자연산 [[연어]], 생태 등) 등의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은 손에 꼽아서 풀을 뜯어먹을래도 태반이 먹을 수가 없는 풀이어서 먹을 수가 없다. 게다가 정글은 수분과 염분과 열량의 소모가 크게 증가하는 곳이라 더더욱 잘 먹고 체력을 유지할 필요성이 높은 지역이라 [[고기]]를 먹어도 모자랄 판인데, 풀만 먹으라고 하는 건 이미 전쟁을 포기해버린 수준이다. 심지어 이들은 일반인도 아닌 [[군인]]이다. 군인은 전투력 유지를 위해 여러 장구류를 휴대하고 다니고 강도 높은 훈련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빠져나가는 열량이 매우 높아서 튼실하게 보충해야만 한다. 성인을 기준으로 일반적인 현대인의 하루 권장 섭취 열량은 2,000~2,400kcal 정도이지만, 육체노동자나 작전 중인 군인은 4,000~7,000kcal 정도까지 소모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즉, 컨디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식사량이 몇 배로 증가하는 것이다. 그 옛날 [[나폴레옹]]이 '군대는 잘 먹어야 진격한다'고 말한 것과, 현대 [[대한민국 육군]]이 [[짬밥]]을 선택이 아닌 의무로 먹도록 '명령'으로 강제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시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억지로라도 먹이려 드는 이유가 바로 이런 까닭 때문이다. 그리고 상기한 대로 가축도 마찬가지지만, 독초나 못 먹는 풀들이 무성한 정글에서 함부로 이것저것 뜯어먹었다간 [[독버섯]] 같은 것에 부대 단위로 중독될 수도 있고, 최하 수십에서 수백 명 이상이 한순간에 골로 가버리는 수가 있어서 매우 위험하다. 게다가 [[사단(군사)|사단]] 수준의 인원이면 최소 몇천~몇만 단위인데 그 숫자가 뜯어먹게 안전한 식물이 충분할 리도 없다. 그 결과로 당시 [[일본군]]의 기록을 살펴보면 각종 독초를 뜯어먹고 부대 전체가 쓰러졌다던지, 그나마 먹을 수 있는 [[뱀]], [[도마뱀]], [[새]], [[원숭이]] 등 각종 동물은 물론 벌레까지 잡아먹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는 증언들이 무수히 많다. 그야말로 수렵과 채집만으로 연명하던 [[구석기]] 시절 인류의 재림인 것이다. 물론 저런다고 식량 부족과 굶주림이 해결될 리가 없으니까 결국 부대 체계가 무너지고 각종 [[전염병]]이 기승을 부려 [[일본군]]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마인칸 교외에서 연합군에 투항해 온[* 참고로 [[일본군]]은 앞뒤 사정 따지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항복과 포로 자체를 대역죄로 여겼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항복'''했다. 아무리 일본군이라도 '''굶어 죽는 건 아니었나 싶다'''.] [[일본군]]의 영양실조는 놀라울 만큼 심했다. 개중에는 문자 그대로 굶어 죽기 직전인 자도 있었다. 먹을 것을 던져 주자 몹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그것을 받아 먹었는데, 10일이고 1개월이고 아무것도 못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나무]] [[뿌리]]나 [[벌레]]를 잡아 먹으면서 연명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사람은 '''[[중위]]였고''', 당연히 [[인육]]도 먹었다. 결국 분이 안 풀렸는지 전쟁이 끝나고 무타구치의 장례식에 찾아가서 [[깽판]]도 실컷 부렸다.] >---- >장인중(張仁仲)[* [[중국]] 중앙일보의 [[종군기자]]로서, 무타구치가 있었던 [[임팔 전투]]에 있었다.] 결국 일본군은 둘러싸여 후퇴로도 보급도 끊긴 절망적인 상황에서 있는 식량마저 다 떨어지고, 그나마도 없는 벌레나 풀뿌리만 겨우 뜯어먹으면서 쫄쫄 굶으며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으로 [[아사]]하거나, 급기야는 아군의 시체에 손 댈 만큼 [[막장]]이 되고 말았다. 상식적이라면 이러한 제정신이 아니게 된 상태에서 뭘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최후의 방법으로 [[둔전]]이라도 시도할 수도 있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종자로 쓸 씨앗도 없었고 충분한 시간과 여유, 알맞은 날씨, 작물을 키울 공간도 없는 상태에서 둔전이 가능할 리가 없다.[* [[파푸아뉴기니]] 지역의 [[라바울]] 같은 경우는 둔전에 성공했지만, 여기는 [[미군]]이 일부러 우회를 위한 개구리 뜀뛰기 작전의 일환으로 고립 상태의 적이 둔전을 하며 군사력과 체력을 낭비하도록 방치한 경우이다. 아예 농사 지으러 가는 [[일본군]]을 공격하지 말라고 [[미군]] 조종사들에게 지령이 내려졌고(단, 둔전하러 가는 병사는 공격하지 않았지만 쌓아둔 수확물이나 창고, 식량을 수송 중인 트럭들은 마음껏 공격하게 했다), 나중에 일본 항공기가 라바울에 전무한 상태에선 신참 조종사들을 라바울 위로 날아다니게 하며 실전 훈련까지 시켰다. 사실 라바울은 병력 8만에 유능한 지휘관 [[이마무라 히토시]]가 있어 방비가 철저했기에 미국 입장에서도 탈환하기엔 부담스럽긴 했다. 전후 미국 조사단도 라바울을 건너뛴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평했다.] 더구나 임팔 같은 험한 곳에서 둔전을 하려면 일단 [[정글]]을 불태워 [[화전#s-3]]을 해서 넓은 공간을 만든 후에나 벼농사 등이 가능한데,[* 태우지 않으면 이미 훨씬 생명력이 강한 온갖 식물들이 점거한 채라 곡식이 잘 자랄 리가 없다. 토양 자체도 식물에 필요한 게 다 빠져나갔으므로, 식물을 태워서라도 비료를 주지 않으면 농사는 불가능하다.] 연합군 정찰기들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과 넓은 지역이 불태워져 밭으로 변한 걸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고, 발견한 후에는 일본군이 식량을 자급하려 일하면서 작물을 관리하는 걸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으니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방침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작전의 계획 단계부터 상급 부대 참모장이 미친 듯이 깠고, 더욱이 [[삼간사우]]로 악명 높은 [[사나다 조이치로]] [[대본영]] 작전과장조차도 처음 작전 계획을 봤을 때부터 '''"작전 계획이 엉망진창이다!"'''라고 무타구치가 작전 계획안을 처음 올렸을 때부터 태클을 걸어왔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정 보급이 안 되면 [[일본 해군|해군]]의 협조라도 얻어야 한다."'''하면서 최후까지 태클을 걸었다. 당시 사정을 모르면 '타군의 지원이 필요할 정도로 무리한 작전'이라는 그냥저냥 상식적인 발언으로 들릴 수 있는데, 저 당시의 일본 육군과 해군은 지금의 [[한일관계|한국과 일본]] 만큼이나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사이가 흉악하게 나빴다]]. 어느 정도였냐면은 육군은 해군에게 손 벌리기 싫어서 '''[[삼식잠항수송정|자체적인 잠수정]]을 개발해서 배치할 정도'''였다. 즉, 말이 좋아 육군과 해군이지, 실상은 그냥 '''사이 나쁜 [[군벌]]이 2개가 존재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즉, 조이치로의 '(일본군) 해군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는 발언을 현대의 [[대한민국]]의 상황으로 치환하면 '[[일본 자위대]]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는 수준의 막 나가는 폭탄발언인 셈이다. 게다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 게 사나다 조이치로는 무타구치 렌야의''' 육군대학 10년 후배'''였다. 파벌과 연공 서열을 아주 심하게 따지는 일본군에서 '후배란 놈'이 '10년 선배'에게 '당장 전역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의 폭탄발언을 대놓고 마구마구 쏟아낸 것'이다. 사나다 조이치로 같은 [[무능]]한 인간조차도 이런 막 나가는 발언까지 해가며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임팔 작전의 골자가 얼마나 심각하게 문제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유언]]이 상당히 골때리는데 >'''[ruby(私, ruby=わたし)]は[ruby(悪, ruby=わる)]くない、[ruby(部下, ruby=ぶか)]が[ruby(悪, ruby=わる)]い'''[br]'''[[유언/실존인물/동양|나는 잘못이 없다. 부하의 잘못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